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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묵(金平?)ㆍ1819(순조19)~1891(고종28)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菴), 본관은 청풍이다.
중종조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창하던 김식(金湜)과 효종조에 영의정을 역임한 유명한 경제학자이며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잠곡 김육(潛谷 金堉)의 후손이다. 성양(聖養)의 아들로 포천 가산면 가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조부는 시곡(時谷)인데 중암이 11세 되던 해 임종을 하면서 이르기를 공부는 과거를 위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참된 공부는 훌륭한 인격자와 참된 선비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 반드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배워야 하였다. 또 이르기를 돈과 곡식을 늘리지 못함이 집의 재앙이 아니요 주리고 추운 것이 뼈에 사무쳐도 몸의 재앙이 아니라 재앙은 항상 배부르고 따뜻한데서 나니 평안한 것만 생각하고 도의(道義)는 생각지 않는데서 온다 도의를 실천하면 천리(天理)가 이루어지고 천리가 이루어지면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아비는 아비, 자식은 자식(君君, 臣臣, 父父, 子子)의 도리를 다하게 되어 도의 국가가 이루어져 참되게 잘 사는 길이니 종신도록 유념하라고 하였다. 중암은 조부의 유명을 끝까지 지켜 한말의 대학자가 되어 우리 민족의 정기를 기리며 살았다.
5세 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을 정도의 천재이었고 8세 때 소학을 읽었다.
11세 때 조부가 사망하고 13세 때 경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니 어려운 가세가 더욱 어려워져 농사일을 돌보려 하니 모친 황부인께서 “벌써 할아버님의 유명을 잊었단 말이냐?”하고 크게 꾸짖고 “모든 어려움은 이 어미가 감당할 터이니 너는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라.”하였다. 김평묵이 대학자가 된 것은 훌륭한 할아버지, 어진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운담영당-

1842년 24세 때 당대의 대학자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으며 그 학풍을 이어 받아 최익현, 유중교, 유인석, 유기일 등과 같이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의 실천가가 되어 탐관오리와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매국역적을 응징하며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병 활동의 전개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데 최선봉에서 활약하였다.
조정에서 여러 번 여러 가지 관직을 내리고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고 학자의 본분을 지켜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를 양성하면서 나라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나 잘못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악한 것을 제거하라고 직소(直訴) 하였다. 그러므로 권자의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하고 귀양살이도 여러번 하였으나 공의 우국정신(憂國精神)은 변함이 없었다.
임오군란 후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시정하여 다시는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상소를 하였다가 임오군란의 배후인물이라 하여 유배령이 내려 유배길에 오르자 친지, 제자들이 나와 슬픈 모습을 보이자 이들에게
  서양의 거센 바람 휘몰아오니
  흰머리 펄렁이는 늙은 이 몸은
  황폐한 귀양길에 다시 나섰소.
  동파로 아홉 번을 겪었지만
  한번도 후회라곤 하질 않았네.
  벗님네여 어서 눈물을 거둬 주구려.
하는 시를 남기고 떠났다. 선비답고 대학자다운 의연한 모습이었다.
공은 68세가 되도록 학문만을 알며 나라와 겨레만을 위하여 몸을 바쳐 활동하였고 또한 조부의 유훈대로 재물에는 전혀 뜻을 두지 않았다. 도의(道義)만을 생각하고 실천하였기에 집 한 채가 없었다.
제자들이 이를 안타까이 여겨 포천군 일동면 운담에 집 한 채를 지어 운담정사(雲潭精舍)라 이름하고 이 곳으로 이사토록 하였다. 생계를 도와드리며 운담정사 앞 시냇가 송림(松林) 한 가운데 대(臺)를 모으고 거연대(居然臺)를 지어 드렸다.
근처에 은퇴하여 있던 약산 김병덕(약산 金炳德) 상공이 제자들이 정성을 다하여 선생을 받드는 모습을 보고 대학자 김평묵 선생이 이곳에 계시니 이고장의 영광이라 하며 생계를 도와드렸다.
1891년(고종20)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날따라 바람이 몹시 불고 종일토록 눈이 내려 석자나 쌓였다고 한다.
3개월 후 전국 사림장으로 백운산하 다목동에 장사지냈다. 나라에서는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께서는 한말정치 혼란기에 기호학파의 거성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선생의 수제자로서 간신배들이 정권을 농락하고 외세가 밀어닥치어서 도의와 인륜이 인멸되어 사문(斯文)이 쇠퇴함을 근심하여 이를 구제하고자 임금께 수없이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동문과 제자들까지 여러 번 옥고와 유배를 당하였다.
일생을 오로지 문ㆍ충ㆍ의(文ㆍ忠ㆍ義)만을 위하여 살다가 가시었다. 제자와 사람들이 선생의 높은 덕을 기리고저 곳곳에 영당과 제당을 설치하고 제향하였다.
이곳에도 유림과 제자들이 운담정사 자리에 영당을 세우고 선생과 함께 선생께서 평생 경모(敬慕)하던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 이항로(李恒老)선생을 함께 배향하고 제향을 받들어 오다가 6ㆍ25사변으로 운담영당이 소실되어 제향을 받들지 못하였다.
1993년 8월 포천유림들이 운담영당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조건행, 부위원장에 최종규, 이효종을 선출하고 복원을 적극 추진하여 안상섭이 대지를 기증하고 이진호 포천군수의 적극적인 협조로 군비 1억5천만원과 유림들의 성금으로 1999년 10월 현 운담영당을 복원하고 향화를 다시 받들게 되었다.
제향은 매년 음력 3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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