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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헌(奇自獻)ㆍ1567(명종17)~1624(인조2)


 

 

문신으로 초명은 자정(自靖), 자는 사정(士靖),호는 만전(晩全), 본관은 행주(幸州), 한성부윤 대항(大恒)의 손이고 응세(應世)의 자이다.
1582년(선조15)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90년(선조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였다. 학문이 뛰어나서 사마시(司馬試)와 증광시(增廣試)에 연이어 급제하였는데 시(詩), 부(賦)가 뛰어나 일시에 명성을 크게 떨쳤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와 같이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에게 수학하였다.
급제후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1591년(선조24)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나서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이 되고 1592년(선조25) 봉교(奉敎)에 승진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병조와 이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左部承旨)를 역임했다.
1592년(선조25)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였는데 어머니 제삿날이라 동대문 밖에 나갔다가 왕이 피난간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려가서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5월13일에 평양에 당도했다. 왜구가 화평을 청해왔을 때 조정에서는 의론이 분분하여 혹은 강계(江界)로, 혹은 함흥(咸興)으로, 혹은 평양을 사수하자고 하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으나 기자헌은 만약 서쪽으로 가면 평양보다 못하고 화평을 논의 하면 또 적을 불러들일 우려가 있으니 당분간 평양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하니 선조가 이를 따랐다. 그리고 각처에서 올라오는 장계(狀啓)를 이호민(李好閔)과 더불어 기록해서 후일에 대비하였다.
1597년(선조30)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599년(선조32) 강원감사로 나갔으며 이곳의 효자 안응준(安應俊), 정자번(鄭自蕃) 등을 나라에서 표창해 줄 것을 건의했다. 그 후 경기감사로 재직할 때에는 영평(永平)의 4열녀(烈女)를 위한 정문(旌門)을 세워 기리게 했다.
내직으로 들어와서는 이조, 병조, 예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600년(선조33)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여서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서건(謀反事件)에 연루된 혐의로 원사(寃死)한 최영경(崔永慶-저명한 성리학자- 氣節을 숭상, 전정경학(專精敬學)의 학문을 주장하였다.)을 신원(伸寃)케 하였다.
1604년(선조37)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을 지내고 이어서 공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다. 이어서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였는데 이때 선조가 세자(世子) 광해군(光海君)을 폐하고 인목왕후(仁穆王后)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자로 삼으려하자 이를 극력 반대했다. 그리하여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광해군을 즉위시키는데 공헌했다.
1611년(광해군3)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는데 대북파(大北派-정인홍, 이이첨의 무리)의 전횡(專橫)이 심해지자 사의를 표명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옹립한다고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일당이 무고하여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자 정은(鄭蘊)이 극력 반대하여 극형을 받게 되었는데 기자헌이 강력히 반대하여 감형케 하였으며 광해임금께 글을 올려 계축옥사가 부당함을 설득하고 강릉으로 내려가 사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고 1614년(괭해군6)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1617년(괭해군9) 폐모론(廢母論)이 나오자 그 부당함을 상소한자가 수백명이 되었다. 광해군이 의정부에 나와 폐모론을 의론할 때 기자헌이 왕의 잘못을 극력 간언하여 삭주(朔州)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길주(吉州)로 이송되었다.
1619년(광해군11)에 광해군이 기자헌을 소환하고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임명하였으나 끝내 사직하고 동해안에 머물며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의 유적을 살피며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당시 김류(金?), 이귀(李貴)등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반정모의(反正謀議)에 가담 할 것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하는데 가담할 수 없다하여 거절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인조가 선왕(先王)의 옛 신하들을 등용하면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해 7월에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었고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內應)할 것을 우려하여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었다. 이때 나이 62세였다. 참으로 억울하게 죽은 것이었다.
1627년(인조5) 이원익(李元翼), 이귀(李貴) 등이 상소하여 기자헌을 복작 신원(復爵 伸寃)했다.
묘는 소흘읍 석문이고개(石門嶺) 행주기씨(幸州奇氏)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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