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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金權)ㆍ1549(명종4)~1622(광해군14)


 
  문신으로 자는 이중(而中), 호는 졸탄(拙灘)이다. 본관은 청풍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 김식(金湜)의 손이며, 현풍참봉 덕무(德懋)의 아들로 가산면 가산리에서 출생하였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계 성혼(牛溪 成渾)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과 가까이 교유(交遊)하였다. 1580년(선조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전적 감찰을 거쳐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였다. 예조, 호조 좌랑을 지내고 1585년(선조18) 사헌부 헌납으로 승진되었다.
이미 고인이 된 이이(李珥)를 비난하는 정여립을 반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후 정여립이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된 후 1590년(선조23) 조정의 부름을 받아 수차례 관직에 전직되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전임되었을 때 좌의정 정철이 간신배들에게 모함을 받아 강제로 귀양을 가게 되고 조정의 다른 명사들도 많이 물러났으며 김권도 파직되어 집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서북으로 피난을 하였다. 가산면 대곡 산골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 송구하여 사이길로 달려가 성천(成川)에서 선조를 배알하니 선조가 기뻐하여 문학에 임명하고 이조좌랑을 겸임케 하였다.
이어서 교리 사간을 역임하고 1594년(선조27) 서울로 돌아와 어사(御使)가 되어 함경도에 가서 백성을 위로한 후 정무를 살피고 돌아왔다. 의정부 사인, 수찬, 직강을 역임하고 삼척부사로 5년을 있다가 돌아와 사북시정을 지낸 다음 연안부사로 나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도청관(都廳官)이 되어 봉릉역사(奉陵役事)를 맡아 임무를 마쳤다. 통정대부에 승차하고 여주목사로 나갔다. 1612년(광해군4)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청풍군(淸風君)에 봉해졌다. 자헌대부 동지춘추관사 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同知春秋館事 都摠府 都摠管)에 올랐다.
1615년(광해군7)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오니 정인홍, 이이첨 일파가 정권을 전횡하니, 정국이 매우 어지러워 노독(路毒)을 핑계로 두문불출하였다. 1617년(광해9) 정인홍, 이이첨 무리의 악행이 극에 달하여 폐모론(廢母論)까지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극력 반대하다가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무안으로 옮겨졌다.
무안 적소에서 5년간이나 있었는데 도성에서 사람이 나와 서궁(西宮-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있던 곳)에 악귀가 있다하여 백대연 등이 침입, 대비를 시역(弑逆)하였다는 유언이 돌고 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졸도하여 쓰러져 종일토록 통곡하더니 그때부터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 이때 74세였다. 광해군이 이 소식을 듣고 관직을 복직하고 장례를 관에서 돕도록 하였다.
인조반정 후 조정에서 조관(朝官)을 보내 제사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하고 효종때 충간(忠簡)이라 시호를 내리었다. 무안에 남사사(南士祠), 송림서원(松林書院) 청풍에 봉강서원(鳳岡書院), 포천의 산앙단(山仰壇)에 배향하고 높은 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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