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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신편


류기일
  류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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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선
류전
류병철
         
           

 


류기일(柳基一)ㆍ1845(현종11)~1904(고종41)


 

  선생의 자는 성존(聖存), 초호는 용계(龍溪) 후에 용서(龍西)라 하였다. 문화인으로 선조조때 영의정 시영부원군 류전(始寧府院君 柳琠)의 12세 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한 학자 병철(秉喆)의 차남으로 소흘읍 고모리 향적산(香積山) 아래에서 출생하였다..

-류기일선생 영정-

선생은 용모가 준수하며 성품이 강직하고 총명이 뛰어났다.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대문 앞에 모란(牧丹)꽃이 만발한 것을 가르키며 시를 지어 보라하니 모란화 다발(牧丹花 多發) 부귀우번화(富貴又繁華) “모란꽃이 만발하니 부귀하고 또한 번화하리다” 라고 지어 어른을 놀라게 하였다.
선생은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13세 때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시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소학(小學)에 배운 것과 같이 분(糞)을 맛보고 이르되 “분”이 쓴데 환후가 차도가 없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하며 정성을 다하여 시탕(侍湯)한 효자이었다. 장성하여 같은 고향의 선배이신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 선생의 주선으로 당대의 대학자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을 전수하며 화서 선생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었다. 동향의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도 화서 선생의 문인이었다. 따라서 화서 선생의 수제자 세사람 모두 포천 동향이었다.
화서 선생이 간신의 모함으로 체포되어 구금되자 용서 선생은 옆에서 모시고 같이 고생을 하니 화서께서 고생하지 말고 집으로 가라하니 ‘선생님은 부모와 같은데 자식이 되어 어찌 모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방면되실 때까지 같이 있다가 같이 돌아왔다. 화서선생이 별세하시자 그의 수제자인 김평묵 선생 문하에서 유학을 전승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용서선생은 관직에는 일체 나가지 않고 도의(道義)를 밝히고 윤리(倫理)를 부식(扶植)하며 성리학(性理學)을 개발하면서 후진 교육에만 전념하여 그 제자가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면암 최익현 선생과는 동향 동문으로 우의가 두터워 외세가 침입할 때 위정척사(衛正斥邪), 진선폐사(陳善閉邪)에 뜻을 같이하여 우국우민(憂國憂民)의 성심(誠心)으로 상소(上疏), 간쟁(諫爭)하다가 여러번 구금되어 곤욕을 치렀다.
특히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무분별한 개혁에 면암과 같이 많은 투쟁을 하였다.
고향에 돌아와 후진 교육을 하며 학문연구에 전심하여 주자변증록(朱子辨證錄), 척양록(斥洋錄)과 문집 90여권을 저술하여 남기었다.
용서선생은 거유(巨儒)로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국운이 쇠퇴할 때 우국우민(憂國憂國)의 근본이며 숭성 모현(崇聖 慕賢)과 지효(至孝)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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