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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金昌翕)ㆍ1653(효종4)~1722(경종2)

 
  자는 자익(子益)이고, 호는 삼연(三淵)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척화학자(斥和學者)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淸陰 金商憲) 상공의 증손이고,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이다. 영의정 창집(昌集 ), 대제학 창협(昌協)의 아우이다. 정관재 이단상(靜觀齋 李端相) 문하에서 수학하고 또한 졸수재 조성기(拙修齋 趙聖期)와 아버지의 스승이기도 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자주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인품이 출중하고 성품이 호방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고 큰 뜻이 있어 부귀와 사치스러운 것은 더러운 것을 본 듯 하였다. 그러나 약관(20세) 이후에는 서서히 기질을 꺾고 처사를 느긋하게 하며 행도에 법도가 엄숙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환로(宦路)에는 뜻이 없었으나 아버지의 명에 따라 진사시에 응시하여 일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이후에는 과장(科場)에 일체 나가지 않았다. 백악(白岳) 기슭에 낙송루라는 집을 짓고 동지들과 더불어 독서를 하고 산수를 즐기며 시작(詩作)으로 세월을 보냈다.
우의정 식암 김석주(息庵 金錫?)가 그의 문장과 탁월한 식견 및 행동을 보고 조정에 천거하여 1684년(숙종10) 장악원 주부를 제수 받았다. 1696년(숙종22)에는 서연관(書筵官)에 선발되고 1715년(숙종41)에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 받았으며 경종 초에는 집의(執義)에 승격되고 또한 경종은 세자 시강원 진선(侍講院 進善)으로 불렀으나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방랑시인 모양으로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찾아 시작(詩作)을 하면서 산수를 즐겼다. 그는 유(遊)와 은(隱)의 속성이 강한 은자(隱者)였지만 자아의 실현과 자기표현의 측면에서는 전형적인 시인이었다.

벼슬길을 버리고 시업(詩業)을 선택한 그는 평생 시인임을 자부하였으며 보고 느끼는 삶의 애환 그리고 발견과 깨달음의 기쁨을 시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은 시가 남아있는 것 만해도 500여수에 이르렀다. 후세에서는 농암(農巖-형 昌協)의 문(文)과 삼연(三淵)의 시(詩)를 쌍벽(雙璧-두개의 구슬)이라 일컬었다.
그는 일찍이 천마산과 금강산을 구경하고 강화도 적석사(積石寺)에 들어가 한동안 글을 읽었다. 속리산과 백마강을 구경하고 평양을 유람하였으며 강원도로 들어가 한계령을 넘어 설악산을 답사하고 월출산과 죽촌정(竹村亭)을 돌아보면서 많은 시작(詩作)을 남기었다.
1676년(숙종2)에는 중형 창협(昌協)과 같이 중흥사(重興寺)를 찾아 한동안 그곳에서 독서와 학문연구를 하였다. 1679년(숙종5) 철원의 용화사(龍華寺)에 우거하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삼부연(三釜淵)의 절경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호를 삼연(三淵)이라 한 것도 삼부연의 경치에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포천에 들어와서는 백운계곡과 영평천 영평팔경에 매료되어 아버지의 노후를 생각해 주거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장희빈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하려는 숙종의 뜻을 서인들이 시기상조라고 반대하자 남인들이 탄핵하여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제거되어 유배 혹은 죽엄을 당하고 정권이 남인에게 넘어간 사건)으로 아버지(수항)가 삭탈관직되어 유배되자 적소인 진도(珍島)까지 배종하였다가 그 곳에서 사사(賜死)되자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아버지의 노후를 생각하여 마련하여 두었던 주거지 이동면 연곡리에 중형(창협)이 은신하고 있어 그곳에 아버지의 궤연(?筵)을 모셨다. 이때 촌로 김성대(村老 金聲大)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고 적막한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이해 가을 청평산에서 설악 한계령을 거쳐 1693년(숙종19) 봄 양평 국연(菊淵)과 서종면 노문리(盧門里)에서 기거하였다.
1695년(숙종21) 영평에 돌아와 머물렀다. 백형 창집의 임지인 배천(白川)과 강화를 왕래하였으며 1710년(숙종36) 강릉 오죽헌(烏竹軒)을 거쳐 간성(杆城)의 경승지를 유람하고 이어서 평강의 부석사(浮石寺)에서 머무르다가 영평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722년(경종2) 장형 창집이 조태채(趙泰采), 이이명(李?命), 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4대신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이 무고하여 사사되자 충격을 받고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6세이었다. 지금의 포천시 신읍동에 있는 부인 묘소에 합장했다. 조정에서는 이조판서에 증직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내렸으며 숙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성리학에 밝고 도학과 문장에 뛰어나 형제 모두가 율곡 이후의 대학자로 칭송된다. 더구나 삼연은 70세를 통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한 시인이며 명리를 돌보지 않고 세속을 떠난 은자(隱者)요, 독학자득의 학자라는 평을 받아왔다.
포천의 요산영당(堯山影堂-지금은 요산단)을 비롯하여 춘천의 춘천영당(春川影堂),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양근의 미원서원(迷原書院), 강릉의 호해정영당(湖海亭影堂), 덕원의 충곡사(忠谷祠), 양구의 서암사(書岩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집(三淵集), 심양일기(審陽日記), 문취(文趣)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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