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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ㆍ1607(선조40)~1689(숙종15)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그의 이름이 3000번 이상 올라있고 전국의 서원 42개소에 제향 되어 있으며 또한 성균관 문묘(文廟)에 역사상 거유 18현이 배향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한분이며 또한 종묘(宗廟)에 묘정배향공신(廟庭配享功臣)이다. 그리고 대학자에게만 높여서 붙여지는 송자(宋子)라는 성인의 칭호까지 받은 분이다.
우암 선생은 정치가이기 전에 경학자(經學者)이었고, 노론의 영수이었으나 당인(黨人)이기보다는 도학자(道學者)로서 일생동안 경학(經學)의 궤도(軌道)에서 한 발자국도 이탈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의리정신(義理精神)은 춘추대의(春秋大義)에서 선비정신으로 연결되는 도학의 바탕이었다.
우암선생의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 우암(尤菴))은 호이다.
충청도 옥천에서 송갑조의 삼남으로 출생하여 곤궁한 가운데 장성하였지만 학문에는 열심이어서 약관에 이미 성명(聲名)이 높았고,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 이후로는 그 명성이 더욱 높았다.
1633년(인조11)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일등으로 합격, 동년 10월에 강릉 참봉(江陵 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곳에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곧 사임하고 돌아왔다.
1635년(인조13) 29세 때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대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후에 효종(孝宗)과 특별한 관계가 되었던 것도 이때부터 맺은 정이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인조)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하였다. 청과의 화의가 성립되고 봉림대군은 심양으로 볼모로 들어가게 되자 낙향하였다.
조정에서는 현령, 지평(持平)의 벼슬을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47년 효종(봉림대군)이 왕위에 올라 각별한 유시가 있자 조정에 나와 집의(執義) 자리에 있으면서 매일같이 경연(經筵-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를 궁중에 불러 경학을 강론케 하던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책에 대해서도 진언하였다. 당시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행패가 심하여 여러차례 행패를 막도록 진언하였으나 선조(先朝)부터 있던 중신이라 별안간 처치할 수가없어 주저하고 있는지라 우암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김자점이 파직되고 목사, 동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판 등의 벼슬을 주고 식찬(食饌)까지 내리고, 태의(太醫)로 하여금 건강을 돕게하는 등의 전례없는 은전(恩典)을 게속 베풀었으나 그 때마다 그는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이후원(李厚源)의 건으로 송시열을 이조판서에 송준길(宋浚吉)을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밀교까지 전하니 조정에 올라와 여섯 번의 사직소를 올리며 사양하였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돈소(敦召)하니 신하의 도리로서 하는 수없이 그 자리에 앉게 됨으로서 비로서 정치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참봉을 두달 밖에 지내지 않고 집의에 잠시 있던 선비가 일약 정이품 이조판서(내무부장관)가 된 것이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왕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져서 그의 진언과 시책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었고, 그의 발언은 곧 정책에 반영되었다.
특히 왕이 나라의 원수를 갚고 부왕(父王-인조)의 치욕을 씻고자 계획한 북벌계획(北伐計劃)에 대하여 논의할 때는 승지와 사관마저 그 자리에 두지 않고 우암과 마주않아 계책을 논의하였다. 이때 영의정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 우의정 이후원(李厚源), 이조판서 송시열, 병조판서 송준길, 훈련대장 이 완(李 浣)이 효종임금을 도와 북벌게획을 추진하던 핵심 인물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우암은 대군 시절 스승으로서 은밀한 중에 기약하는 바가 두터우니 사람들은 그들을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 문왕(文王)과 태공망(太公望)이 만난 것에 비유하였다.
왕의 큰 뜻을 받들어 어진 신하들이 일심협력하여 장사를 뽑아 군졸을 훈련하고 내정을 닦아 군량을 저축하고 병기를 정비하면서 7년간을 와신상담(臥薪嘗膽) 지냈으며 때를 보아 북진명령을 내릴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 어느날 왕은 송시열이 입시할 적에 입는 옷을 보고 ‘너무 엷어서 추위에 질병이 생길까 염려된다.’고 하며 초피(貂皮) 옷을 하사하였는데 우암은 과분함을 아뢰어 사양하였다.
왕이 ‘경은 아직도 내 뜻을 모르오. 요동 땅 찬바람 속에 그대와 함께 내달려야 할 것 아니요.’ 하였다. 그 임금과 그 신하가 서로 믿고 기대하던 마음은 가히 금석도 뚫고 귀신도 울릴 수 있었다.
우암은 이 초피 옷을 일생동안 간직하며 효종대왕의 기일이면 부둥켜안고 호곡하였다 한다. 이렇게 조야(朝野)가 일치되고 불벌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때 영의정에서 파직된 김자점(金自點)이 북벌계획에 관한 일을 청국에 일러바치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청국에서 대노(大怒)하여 진상조사단과 함께 문죄사(問罪使)가 오고 야단이 났다. 왕은 기민한 수단으로 외교술에 능란한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청국에 보내고 ‘우리의 군비확장은 왜구(倭寇)를 막기 위한 자위수단’이라고 해명하여 간신히 위기를 면하고 영의정 이경여를 해임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였다.
왕은 그날 저녁 이경여를 불러 ‘그간 수고 많았소’ 하고 두 손을 마주잡고 있다가 봉투 한 장을 하사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경여가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어필로 『일모도원(日暮途遠) 지통재심(至痛在心)-해는 저물어 가는데 갈 길은 머니 아픈 마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구나』라고 쓰여 있었다. 이경여는 어필을 받들어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한다.
청국관계가 일단락되자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은밀히 북벌계획을 추진하여 나갔다. 1658년(효종9) 설욕과 복수심에 불타던 왕은 승마술을 익히다가 낙마하여 기력이 손상되어 있던 차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등창이 나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때 한발이 계속되어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느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강행하였다. 피로가 겹쳐 종기가 악화되어 북벌의 큰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하니 불벌을 계획하던 중신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결국 북벌은 일장춘몽에 그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세의 영주(英主) 효종의 승하는 우암에게나 조선의 국운을 위해서나 커다란 불행이었다. 우암은 하사한 초피옷을 껴안고 한없이 울었다.
새로 등극한 현종(顯宗)도 우암을 존경하였으나 전왕과 같을 수는 없었다. 비통할 뿐 정사에 뜻이 없어 사직소를 남겨 놓고 표연히 정든 회덕(懷德)으로 내려왔다. 현종은 깜짝놀라 승지를 보내 다시 입조할 것을 재촉하였으나 뜻을 정한 우암은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
누차 소명하였으나 다만 글을 올리어 정사의 옳고 그름을 말할 뿐이고 국가의 중대사가 있어 부르면 입조하여 자문(諮問)에만 응하고서는 이내 시골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지극한 서러움을 잊기 위해 산천을 주유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현종 연간에도 우암 선생은 의연히 빈사(賓師)의 존중을 받아 조정에서나 향리에서나 국가대사에 그의 의견을 기다렸다.
전날의 예우가 면면하여 1668년(현종9)에 우의정에 임명되니 62세였다. 곧 사임하니 왕명으로 상경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한양에 거주토록 하였다.
11월에 또 우의정에 임명하였으나 사임하고 다음해에 좌의정에 임명하니 효종릉 영릉(寧陵)을 여주로 이봉하고 사임하였다. 1674년(현종15) 예송(禮訟) 복상(服喪) 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덕원(德源)에 유배됐다.
1679년 거제도로 이배(移配),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683년(숙종9)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정계에서 은퇴해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였다. 1689년(숙종15) 장희빈의 아들로 왕세자(王世子)를 책봉하자 시기 상조라고 상소했다가 제주도에 유배됐다.
1690년(숙종16)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서인이 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되었다. 강상이 무너지고 정치가 난장판이 되었다. 간신배가 발호(跋扈)하여 모함ㆍ중상으로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사사되고 간신배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사대신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命)이 억울하게 사사(賜死)되던 정치암흑기였다.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우암 선생이 무사할 수 없었다. 민암 등의 책동으로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이때 선생의 나이 83세였다. 현자(賢者)의 죽음은 의연하였다. 사약을 받기 전날 그의 친지, 제자들이 가시는 모습을 뵙기 위해 운집하여 있었다.
먼저 사약을 받은 김수항이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만일 우암 선생이 나보다 나중에 죽게 되거든 나의 묘지문(墓誌文)을 우암 선생에게 지어 달라.’는 유언을 하여 그 유언장을 가지고 친족되는 사람이 왔다.
그것을 본 우암은 ‘그렇다. 문곡의 묘지문은 내가 지어야 한다.’고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하여 붓을 들었다. 그리고 호화한 대문장 일편을 지어주고 조용히 밤을 지낸 후 그 이튿날 오전에 사약을 받았던 것이다.
현자는 죽음에 대하여 이같이 의연하였다. 선비의 참모습이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6년 후 암흑시대는 가고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선생의 관작이 복작되었다. 그 후 영의정에 추증되어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묘(文廟)에까지 종사(從祀)되어 신자(臣子)라는 최고의 영예가 주어졌으며 송자(宋子)라는 성인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다.
우암 선생은 율곡(栗谷) 사계(沙溪)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통(正統)을 이은 대학자로서 성리학의 정수인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 102책을 저술하였는데 반수 이상을 유배지인 거제도와 제주도에서 저술하였다. 이 방대한 저술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것이다.
선생은 ‘학문이라는 것은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다.’고 하였고,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 만사에 응하는 것은 오직 직(直)일 뿐이다.’라고 하여 우암철학의 핵심을 직(直)에 두었다. 직은 의리정신의 직결이다. 선생의 행동에서 처절하리만큼 투철한 조선조 선비정신의 광채를 볼 수 있다.
선생의 문인은 김수항(金壽恒), 권상하(權尙夏), 이단하(李端夏), 김창협(金昌協), 김수흥(金壽興), 이선(李選), 김만중(金萬重), 이민서(李敏敍), 이담(李湛), 김수증(金壽增), 이우휘(李遇煇), 송기후(宋基厚), 민기중 등 수백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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