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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李恒福) 1556(명종11)~1618(광해군10)


 

 
축석령에서 경원국도를 따라 포천시내로 가다 하송우리에서 내촌으로 가는 길로 약 2㎞쯤 가면 왼쪽으로 마치 평탄한 평야에 부채를 펼쳐서 씌운 형상의 예로부터 영산이라고 불리는 화산봉(華山峰)이 있는데 그 산록에 선조조(宣祖祖)때 명상(名相)이요, 문명가(文名家) 이었던 이항복 선생을 배향한 화산서원이 있다.
이항복선생의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동강(東岡), 소운(素雲),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이고 본관은 경주이며 고려의 문하시중 제현(門下侍中 齊賢)의 후손이요, 참찬 몽량(參贊 夢亮)의 자이다.
선생은 그의 이름인 항복이나 호인 백사보다는 봉호(封號)인 오성(鰲城)대감으로 더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시 왜의 침범으로 나라의 기둥이 뽑히려 하고 온 겨레의 삶이 위태로울 무렵 모두가 쫓기고 허둥대고 울부짖는 가운데 위 아래 모두가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러할 때 선생께서는 벼슬하는 몸으로 마땅히 사사로운 정리를 끊으시고 오로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한다고 결심하고 일곱 해 동안 험하고 어려운 풍진을 헤쳐 나가며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기둥을 다시 바로 세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시다.
오성이 스물세살 때 만나서 평생의 벗으로 지냈던 인물로 옛날 관중(管中)과 포숙(鮑叔)의 사이 못지않게 가까웠던 한음(漢陰)과의 사이에서 빚어진 많은 일화들은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시기에도 활짝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풍자와 해학이 샘솟듯 흘러 넘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두 분이 힘을 합쳐서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의 사직을 바로 세운 양대 지주로서의 버팀목 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용모도 준수하고 매우 총명하여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하루는 새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는데 새 옷은 어디다 두고 누더기 옷을 입고 들어오는 지라 평소에 좀처럼 책망을 하는 일이 없던 어머니께서 노기를 띠고 어찌된 일이냐고 나무라니 ‘이웃집 아이가 제 새 옷을 보더니 꼭 한번 입어보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겠어요. 그래서 옷과 신발을 모두 벗어 주었어요.’하고 소년 오성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나 한 것처럼 말했다. 새 옷을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이웃집 아이가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입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차마 벗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호협(豪俠)하고 의기(義氣)로운 기질을 보여 주는 일이 가끔 있었던 것이다.
여덟살 때 부친이 칼과 거문고를 두고 시를 읊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칼은 장부의 기상이 있고(劍有丈夫氣)
거문고는 태고의 소리를 간직하도다.(琴藏太古音)'
라고 응답하니 아버지는 물론 듣는 사람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이렇듯 장래를 촉망받는 소년 이항복이었지만 그의 재주를 아끼던 아버지는 아홉 살 때 돌아가시고 그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외롭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어머니마저 열여섯 살 때 돌아가시어 큰 누님을 어머님처럼 모시고 살았다.

-화산서원-
오성은 어머니의 상을 벗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는 동안 그의 재질은 곧 세상에 알려졌고 마침내는 당시의 영의정 권철(權轍)이 그의 손자사위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도원수 권율(權慄)이 바로 그의 장인이었던 것이었다.
1580년(선조13) 25세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승정원 부정자(承政院 副正字)를 시작으로 이조좌랑(吏曹佐郞),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동부승지 우승지(同副承旨 右承旨)를 거쳐 서른여섯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라 왕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필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1592년(선조25)에 왜구들이 우리강토를 짓밟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오성은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칠 때라고 결심하고 일체의 사사로운 인연을 끊다시피 하였다. 그는 가족들이 잠깐만이라도 얼굴이나 보자고 하여도 응하지 않고 피난길에 올랐다.
어가(御駕)를 모시고 임진(臨津)나루를 건너는 밤에 비는 쏟아지고 바람도 거세었다.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워 앞이 막막한 왕은 대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이일을 어찌했으면 좋으냐고 누구든 어서 말을 해보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였다. 그때 오성은 도승지로서 침착을 잃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아뢰었다.
잠시 북쪽에 피해가 있으면서 밖으로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안으로는 팔도의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자고 건의하니 선조는 내 생각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면서 오성의 책략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반대하는 대신들도 많았다. 그러나 오성은 한음, 서애와 함께 나라를 구하는 일은 오직 그 길이라고 주장하며 구원병을 요청하고 마침내 명의 원군(援軍)이 압록강을 건너오게 되어 왜군의 기세는 꺾이기 시작하였다. 피난길에 왕의 지우(知遇)를 받은 오성은 이조참판(吏曹參判), 병조판서(兵曹判書)등 요직을 두루 거쳐 여섯해 동안 병조판서 자리에 다섯 번이나 기용되었다는 것은 전쟁을 치르는데 오성의 지혜와 계략이 누구보다도 뛰어 났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외교 수단도 뛰어나 명과의 원군 문제를 비롯한 명나라 장수와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였고 왜(倭)와는 일면 전쟁 일면 협상으로 유도하여 왜란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1598년(선조31)에 우의정이 되고 이어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제수되었으며 동년 6월에는 영의정에 승차하였다.
1600년(선조33) 삼남지방(三南地方)의 도체찰사(都體察使)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어 지방을 순무(巡撫)하고 돌아와 안민방해(安民防海)에 대한 16책을 건의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영의정이 된 이후에는 왕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1604년(선조37) 선조는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으로 서록(敍錄)하고 첫머리에 올리도록 하니 오성은 두 차례나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대가 으뜸가는 공신이 아니라면 그 자리를 차지할 이름이 누구냐고 간곡히 타이르기도 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대사헌이 되고 나서 조정이 시끄러워지면서 우계 성혼(成渾)을 무고하여 탄핵하게 되니 오성은 이를 극력 저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에 강직하기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사임하였다. 그러나 왕의 신임은 변하지 않아 국가에 큰일이 생기면 반드시 오성에게 의논을 하였고 그간의 정의를 못 잊어 2년 후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오성은 벼슬을 사양하고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항복선생 신도비-
1607년(선조41)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오르자 오성을 불러 4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이어서 좌의정을 삼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 배후 세력이었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의 일파가 권력을 잡고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그들의 정적을 몰아 내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들이 광해군의 형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자 하니 당시 영의정인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이를 극력 저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 청하니 왕은 ‘경은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오리(梧里)나 백사(白沙) 같은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내 어찌 왕 노릇을 제대로 하겠소. 지금 여진족의 침입이 심하니 나를 도와주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이에 오성은 간청하는 왕이 측은하여 사임을 유예하였는데 정인홍, 이이첨 등은 임해군을 강화도에 가두었다가 끝내는 죽이고 말았다.
1613년(광해군5) 오성은 사직소를 올리고 은거하였다.
그리고 동강(東岡) 지금의 망우리(忘憂里) 근처에 집을 짓고 한가로운 나날을 보낼 때 야좌(夜坐)라는 제목으로 읊은 시가 있다.
젊어서 나그네로 티끌에 떨어져
세상 만가지 인연에 엉켜왔네
머리 희어 돌아와 강가에 누우니
하늘 가득 풍월은 넓기도 해라
早年爲客落塵煙
弄盡人間萬劫緣
頭白歸來江上臥
一天風月浩無邊
담담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조정(朝廷)은 그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하지 않았다.

-이항복선생 묘-
그 후 계속하여 북인의 정인홍, 이이첨의 무리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제거하였고 영창대군의 외조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친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사건을 꾸며 김제남의 일가와 영창대군을 살해하였다. 또 능창군(綾昌君)이 역모를 도모하였다 하여 죽이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마저 없애기로 하였다. 우선 서궁(西宮)에 유폐(幽閉)하고 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던 이원익은 파직이 되었다.
이에 은거하고 있던 오성은 분연히 일어나 수염을 쓰다듬으며 ‘내 뜻은 결정되었다.’ 하며 죽기를 맹세하고 북인들과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비록 부모가 어질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식은 효도 하는 것이 도리이므로 광해군에게 폐모론은 부당하다는 간곡한 소를 올리고 극력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가 받아들여 질 리가 없었다. 이에 대북(大北)일당은 오성을 죽여야 한다고 왕에게 압력을 가하였고 왕은 견디지 못해 오성의 관직을 삭탈하고 북청(北靑)으로 귀양을 보낼 것을 명하였다.
귀양 명령을 받은 오성은 1618년(광해군10) 정월에 북청의 먼길을 떠나면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아들에게 장례 준비까지 하게 하는 한편 자신이 죽으면 조복(朝服)으로 염하지 말고 심의(深衣)로 하라고 일렀다.
한양(漢陽)을 떠나 철령(鐵嶺)을 넘으면서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寃淚)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 본들 어떠하리
하고 읊은 노래는 오성이 임금을 그리워하며 충성으로 애끓는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어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이 노래가 전파되어 궁궐에 있는 광해군까지 듣게 되었다. 왕은 궁녀에게 그 노래가 어떤 노래냐고 물으니 이항복이 철령을 넘으면서 지은 노래라 하니 광해군은 그 말을 듣고 초연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항복선생 사당-
오성은 그해 5월 배소 북청에서 63세로 서거하였다. 그의 부음이 조정에 전해지자 광해군은 곧 관직을 복직하고 예장할 것을 명하였다. 배소 근방의 백성들은 목놓아 울고 멀리 영남지방의 학자들도 천리를 달려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의 시신은 포천(抱川)으로 옮겨져 선산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관직생활 40년 동안은 심한 당쟁과 임진, 정유 왜란을 격은 때였다. 왜란 때에는 지혜롭고 충성된 활동으로 사직을 보전하고 민생을 구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당쟁에는 언제나 초연하여 그 와중에 휩쓸리지 않고 정도를 잃지 않았다.
평생 청렴결백한 관직 생활로 청백리 녹선이 되었고 그의 문장 또한 뛰어나 몇 편의 시문(詩文)과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및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을 남겼다.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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