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로 선생은 한말(韓末)의 우국지사(憂國之士)로 척사위정(斥邪衛正), 창의보국(倡義報國)의 선도자이다. 포천출신으로 대학자이며 애국지사인 중암(重庵) 김평묵(金平?), 면암(免庵) 최익현(崔益鉉), 용서(龍西) 유기일(柳基一)이 모두 화서 선생의 제자이기에 친근감이 더 든다.
화서선생의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이고 화서는 호이며 본관은 벽진(碧津)이다. 양평 벽계리(蘗溪里) 청화산(靑華山) 아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3세되던 해에 천자문을 읽고, 5세가 되어서는 점점 지혜가 밝아지고 어른들이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에 곧잘 참가하였다. 9세 때 일이다. 선생의 아버지 우록헌(友鹿軒)이 당시의 학자 신기영(辛耆寧), 남기제(南紀濟)등과 경사(經史)를 담론하면서 어린 항로를 그 자리에 끼어 이야기를 듣도록 하였다.
이 때 남기제 선비가 “요새 나는 새로운 것을 얻은 것이 있지. 이 천지 사이에 이루어지는 만사가 한 개의 기(氣)뿐이라는 것을 알았어.”
이 말을 듣던 어린 항로는 “제가 보기엔 천지간의 만사는 이(理)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선생은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네가 아직 알바가 아니야.”하며 일소에 붙였다.
항로는 이에 굽히지 않고 항변하였다.
“선생께서 만일 기(氣)만을 너무 주장하시면 앞으로 대로상에서 선생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구타하는 자가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선생이 일생동안 주리론(主理論)을 펴게 된 근거가 하늘이 이루어 준 정견(定見)에서 출발하였던 것 같다.
그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처음에는 출세를 목표로 과거 준비에 몰두하였다. 17세 때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하여 재명을 날렸다. 이를 본 권력층의 어느 고관이 선생의 재명을 듣고 ‘내 아들과 친근하게 지내주면 대과급제의 길이 빠를 수 있다.’고 하니 이 말을 들은 선생은 그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와 같이 시작된 그의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온 선생은 오직 학문 탐구에만 전념하였다. 한편 이름 높은 선비를 찾아 교유하며 학문을 연구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어느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고 독학(獨學)으로 위기(爲己) 공부에 전력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통달하였다. 특히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데 많은 세월을 보내 정미(精微)한 말과 중요한 뜻을 차례로 알게 되었으며 송자대전(宋子大全-송시열 문집)을 읽고서 그 학문이 진실로 주자 이후의 정종(正宗)임을 알고 존경하기를 주자 다음으로 하였다.
그는 주자를 종주하지 않으면 공자 문정(門庭)에 들어갈 수 없고 송자(宋子)를 본받지 않으면 주자학에 접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30대의 청년 이항로에게는 그 학문과 인격을 사모하는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서사(書舍)가 항상 수용하지 못하였다.
선생은 공자가 춘추(春秋)를 쓰고 주자가 강목(講目)을 저술한 가장 큰 의의(意義)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정신이라고 하였다. 또 “지금 외세가 침입하고 있으니 참된 선비요, 이 나라 국민이라면 척사위정(斥邪衛正-간특한 것을 배척하고 바른 것을 보호한다는 것)에 총력을 경주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요순(堯舜)의 정치와 공주(孔子 와 朱子)의 학문 이외에 어떠한 정치형태나 학문 또는 사상도 이를 배척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가법(家法)에 세 가지가 있는데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살고, 미리 예비하는 것 뿐이다. 국가의 일을 잘 도모하는 사람도 그 방법이 또한 이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48세에 이르러 선생을 흠모하는 청년들의 요청에 의하여 매일 1차례씩 강(講)하는 규정을 두었는데 모이는 문사(文士)들이 항상 100여명이 넘었고 강설에 임하여서는 그 정신과 풍채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49세 때 감사와 이조(吏曹)의 추천으로 장서원, 별제, 전라도사(全羅道事) 등 사령장이 연이어 내려왔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어서 고종이 즉위하자 김좌근(金佐根), 조두순(趙斗淳) 등이 노성한 인물을 기용하자는 제창으로 사헌부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의 화려한 벼슬이 연이어 내려졌으나 모두 사직하고 말았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서울의 서강까지 침범하였다. 이 때 또 동부승지에 임명되니 ‘내가 비록 병들었으나 평일에는 마땅히 사퇴하고 양보하는 것으로 의리를 삼았으나 일단 국가의 환란이 있게 된 때에는 즉각 달려가 협력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 하고 조정에 올라와 난국수습책을 상소하고 사직소를 올렸다.
다음날 공조참판에 발령되고 경연관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국왕이 먼저 전수(戰守)의 굳은 결의를 명백히 표명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추호도 동요되지 않는다.’면 ‘국민 사기는 앙양될 것이요, 민심도 고무될 것이다. 국난을 초래케 한 책임을 지고 호소사(號召使)를 전국에 파견하여 의용군을 모집하여 관군과 같이 협력하면 기필코 승리할 것이다. 라고 상소하고 사임하였다.
5일 후 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으나 또 사임하니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제수하였으나 우국소견을 진술하고 사임하였다.
76세에 선생의 병이 심하여 다시 제자들을 위하여 강설할 수 없게 되자 제자 김평묵(金平?) 등 동문들이 선생의 수고(手稿) 중에서 줄거리를 추리고 그가 문인들과 문답한 내용 중에서 중요한 것을 추려 강의자료를 삼고자 화서아언(華西雅言) 36편을 만들었는데 화서학문의 정수가 수록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중요한 경서(經書)가 되었다.
1868년(고종5) 선생은 77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내부대신(內部大臣)에 추증하고 문경(文敬)의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독학으로 도를 구하고 아버지를 공경함과 같이 나라에 충성하고 집을 염려함과 같이 국가를 염려하였다(愛君如父 愛國如家).
화서학문과 사상을 후세에 전하였고 그 문하 사람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성이 전해지는 인물로는 최익현(崔益鉉), 김평묵(金平?), 유중교(柳重敎), 유인석(柳麟錫), 양헌수(梁憲洙), 유기일(柳基一)을 비롯한 제제다사(濟濟多士)가 배출되었다.
신문화가 밀려들면서 유학이 그 빛을 잃어가고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력 앞에서 국난과 더불어 재래의 학문도 그 뿌리가 흔들리는 처지였다. 이 때에 화서선생의 학문적 공헌은 그 제자들에게 전승되어 국권회복운동에 크게 기여했다.